임인택 칼럼 - < 무덤 친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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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임인택 칼럼 - < 무덤 친구 >

2024.03.06자 조선일보 보도에는 "日노인들이 요즘 '떠나는 길, 쓸쓸히 가기 싫어' ‘무덤친구’를 사귄다고 한다.
황혼기에 접어든 노인들이 함께 합장묘에 누울 이들과 생전부터 다양한 교류를 맺으며 이른바 ‘하카토모’(墓友·묘우, 무덤 친구)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통상 합장묘는 남편이나 부인 등 가족 들이 한 무덤에 묻히는 경우인데, 일본에선 무덤을 돌봐줄 사람이 없거나,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독거노인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 묻히는 경우라고 한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무덤에 누일 사람들끼리 오찬회도 갖는다. 보통 모르는 사람들과 식사를하게 되면 자연스럽지못할 수도 있을텐데, 합장묘가 이어준 인연이랄까 새로운 연결고리란 생각에 전혀 저항감이 없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혈연을 넘어 무덤에 함께 들어간다는 유대감이 노인들의 삶을 느슨하게나마 지탱해준다고 하고 있다. 또한 관에 들어가 ‘시신’이 되는 경험을 미리 해보는 이른바 ‘입관 체험’을 하기도 한다고 한다."

글을 읽으면서 왠지 쓸쓸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분명 밝고 희망적인 얘기는 아니다.
떠나는 길, 쓸쓸히 가기 싫어 친구되어 같이 가자는 얘기다.
오래전 일이지만 필자도 관속에 들어가 죽음을 체험해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별로 큰 느낌이 없었던 것 같다.
그것보다는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지 않은가 생각 된다.

우리의 삶은 현실만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과, 죽음을 함께 의식하며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종말론적 삶'이란 오늘을 살아가면서 '내가 죽어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을 자신'을 느끼며 살아가는 삶이다. 
우리의 주변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며칠 전 살아 있던 친구가 갑자기 죽어 오늘 장례를 치룬다는 소식을 듣기도 한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되고, 그럼에도 한 편 아직 살아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은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기쁨이 아닐 수 없고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캄캄한 땅속에 묻혀 있을 내 자신'을 지금 느낄 수 있다면,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들이 새롭고 아쉬워해야할 대상들이 아닐 수 없고, 미운 사람 싫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돈과 명예와 권력은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오직 순간순간이 소중할 뿐이고, 그 무엇도 다 아끼고 사랑해야만 할 대상들이고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가진 것이 없어도, 명예가 없어도, 권력이 없어도, 어제 부자로 죽은 사람 보다도, 또는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오늘 죽은 사람보다도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내가 행복한 삶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절실하게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죽음을 막연히 상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사실을 지금의  현실로 느끼는 것이다.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것 만큼 오늘 존재에 대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90을 느낄 수 있다면 살아있음에 대한 행복을 90을 느낄 수 있고, 70을 느낄 수 있다면 70만큼 행복을 느낄 수 있으며, 30을 느낀다면 존재에 대한 행복을 30만큼만 느낄 수 있다.
삶의 가치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가치를 느끼는 것 만큼이고, 살아 있음에 대한 가치를 느끼는 것은 죽음을 느끼는 것 만큼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닥쳐 올 사실이고 현실이다.

잘 사는 삶은, 종말론적으로 순간순간을 마지막인 것 같이 진정으로 아쉬워하고, 아끼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이다.
죽음 뒤의 쓸쓸히 떠나는 길을 걱정하는 삶보다,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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