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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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 행복은 깨닫는 것이다 >행복은 깨닫는 것이다 물질이나 권력이나 세상적인 것들로는 행복해질 수 없다.사람들은 10억 원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것인가. 10억 원만 있으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행복해질 수 없다. 10억 원을 가지게 되면 곧 20억 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고 불행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 이번에는 20억 원을 가지게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이번에는 30억 원을 가진 사람을 부러워하게 되고 또다시 불행을 느낀다.권력도 명예도 마찬가지다. 과장인 사람은 부장을 부러워하고 부장이 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부장이 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럴 것인가. 아니다. 부장이 되면 이제는 국장을 그리워하게 되고 또다시 불행을 느끼게 된다.진정한 행복은 불행이 없는 행복이다. 그 행복을 찾고 깨달아야 한다. 세상적 가치의 의미를 알아야 하고 그렇게까지 집착해야만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편리한 것이 행복인 줄 알고 불편한 것이 불행인 줄 안다. 그러나 행복과 편리함은 같은 것이 아니다. 지금 불편은 하지만 평안하다. 불편하다고 해서 걱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들고 어렵다 해도 육체적 아픔은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은 평안하고 행복하다. 그것이 행복이다.감사한다. 진정 감사한다.오늘도 두 다리를 잃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두 다리를 가졌고 어디든지 걸어갈 수 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두 눈을 잃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두 눈을 가졌고 무엇이든 볼 수 있고 무엇이든 느낄 수 있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두 귀를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애타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두 귀를 가졌고 그래서 흐르는 물소리와 바람 소리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세상에는 엄청난 고통과 아픔 속에서 힘들어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걸어갈 수 있고 볼 수 있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건강이 있고, 겸허히 누군가를 위해 감사한 마음으로 기도해 줄 수 있는 여유로움이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행복이냐고,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고 골프를 즐기며 생활하는 그것이 행복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물을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살고 있는 당신은 지금 이 순간 진정한 만족과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살고 있느냐"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편리함은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며 산다'라고 말할 수 없다.행복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다. 깨닫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행복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생각의 변화다. 변화가 없다면 행복을 가지고도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우리의 일상이 행복이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을 수 없고 느낄 수 없다면 행복은 어디에도 없다. 오늘 존재해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사랑할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감사한 일이다.근심 걱정 없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근심 걱정이 있으나 행복할 수 있는 깨달음이 행복이다. 진정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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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5월에 대한 소고5월은 신록의 계절과 함께 가정의 달이라고 한다. 영국의 시인 T. S. 엘리어트가 그의 시 ‘황무지’에서 잔인한 달로 비유한 4월을 지나 보내고,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가정의 달’ 5월이 열리고 있다. 5월이 ‘가정의 달’로 불리는 것은 어린이날(5일), 어버이날(8일), 한 부모의 날(10일), 입양의 날(11일), 세계 가정의 날(15일), 성인의 날(17일), 부부의 날(21일) 등 가정과 관련된 기념일들이 많은 달이기 때문이다. 가족은 우리에게 참으로 소중한 존재이지만 공기의 고마움을 잊고 살듯이 그 소중함을 종종 잊고 지내곤 한다. 친구들로, 바쁜 회사 일로 인해, 때로는 취미생활이나 자기 계발이 우선이 되기도 한다. 가까이 있고 늘 거기 있어, 이 함께함이 영원할 것 같은 착각으로 인함인지도 모르겠다. 가정은 사회 활동의 뿌리다. 가정의 기강이 바로 서야 사회도 바로 설 수 있기에 가정 속에 보람의 세계가 있듯이 미래(未來)의 세계(世界)가 바로 가정에 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여태까지 가족이나 부모님에게 물질로써 보답하면 된다는 생각을 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평소 때부터 가정에 대한 올바른 정신과 따뜻한 마음으로 보답하는 것도 물질적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自覺) 할 필요가 있다. 정신이 바르면 보은(報恩) 하고 감사하는 정신을 키워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동물 가운데에 늑대는 그 눈빛을 보면 아주 표독하고 잔인한 육식 동물이다. 그러나 늑대는 평생 ‘일부일처제’를 유지하는 아주 가정적인 동물이라고 한다. 수컷은 사냥을 주로 하고 암컷은 육아를 담당하며 한 쪽이 죽기 전에는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한 쪽이 죽어 재혼을 하더라도 기존 배우자의 새끼를 끝까지 책임지고 키운다고 한다. 그리고 또 동물의 왕국에서 보는 펭귄의 가족애는 눈물겹다. 배우자와 새끼를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뒤뚱거리며 걸어가고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오는데 그동안 한 쪽은 영하 30~40도의 혹한과 강풍에 수십 일을 꼼짝 않고 새끼를 품 안에 넣고 기다리고 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펭귄들은 서로 부둥켜 않은 채 눈으로 뒤 덥힌 흰 털 복숭이가 되어 몸을 밀착시킨다고 한다. 안쪽에서 추위를 녹인 펭귄은 교대하여 밖으로 나와 추위를 다시 막는다. 이런 동작을 생물학계에서는 ‘허들링’이라고 하며 이런 활동으로 펭귄들은 6개월의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것이다. 우리 부모님, 옛날 어른들이 가장 즐겨 쓰던 말, 그리고 웬만한 집의 안방에나 대청마루에 흔히 걸려 있던 단어가 있다. 바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잘 알다시피 가정이 화목하면 못 이룰 것이 없고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이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기 위해 수 천리를 헤매고 다니다 눈물만 머금고 온 사내가 자기 집 처마 끝에 앉아 있는 파랑새를 보고 땅을 치고 후회하였다는 옛 우화의 일은 되풀이되지 않아야겠다. 가정의 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정을 소중히 여기고 내 가정이 소중한 것처럼 남의 가정의 소중함을 존중할 줄 아는 성숙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가정의 달 5월이기에 더욱더 가정이 단합하고 서로 사랑하여 이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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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아픔을 모르는 자에 대한 물질의 축복은 해(害)가 된다>아픔을 모르는 자에 대한 물질의 축복은 해(害)가 된다. 우리는 가끔 보도를 통해 재벌 2세들의 탈선 행위를 보게 된다. 마약과 도박과 유흥으로 재산과 몸과 가정을 망친다. 또 성서에는 유명한 탕자의 얘기가 나온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들이 재산을 유산 받아 탕진하고 몸까지 망치고 후회하는 얘기다. 성숙되지 못한 자에게 주는 물질의 축복은 해(害)가 된다.신(神)은 인간들이 물질을 얻기보다는 먼저 지혜를 찾고 성숙되기를 바란다. 인간들은 자신의 부족함이나 바람을 신(神)께 간구한다. 그러나 신은 구하는 자에게 무조건 주지는 않는다. 먼저 시련과 역경을 통해 지혜를 찾고 성숙된 삶을 요구하며, 그것이 이루어졌을 때 물질의 축복도 준다.물질보다는 먼저 지혜를 찾아야 한다. 물질과 지혜는 상반되는 것, 둘을 다 얻을 수는 없다. 물질을 얻으려면 지혜를 얻을 수 없고, 지혜를 얻으려면 물질을 얻을 수 없다. 물질이 없다고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은 육신을 위하고 지혜는 영혼을 위한 것, 먼저 지혜를 찾고 성숙된 삶이 돼야 한다.지식은 책 속에서 얻을 수 있지만 지혜는 삶 속에서 얻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할 수 있지만 지혜는 겸허하게 하고 성숙되게 하며, 지식은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지만 지혜는 세상과 영원에서도 필요하다. 지혜를 찾아야 한다.그러나 지혜와 성숙은 안일과 평안속에서는 얻을 수 없고 시련과 역경 속에서 얻을 수 있다. 영적으로 성숙되지 못한 자에게 주는 물질의 축복은 그 사람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삶의 아픔도 고통도 모르게 하며, 아픔과 고통을 모르고는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줄도 모르게 된다. 그리고 성숙의 과정도 없을 것이고 성숙의 과정없이는 삶의 진정한 의미도 깨닫지 못하며 영혼은 병들어 갈 것이다.아픔을 모르는자에 대한 물질의 축복은 영혼에 해가 된다. 먼저 지혜를 찾고 성숙돼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참고 인내할 수 있어야 한다.아픈사람들의 아픔을 알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그 아픔들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 고통들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축복이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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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공동체><공동체>우리는 공동체와 나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공동체와 나는 하나다. 공동체 안에 있지 않고서는 내가 될 수 없다.공동체 안에 있지 않고서는 성숙도, 완성도 이루어질 수 없고 사랑도 나눔도 이루어질 수 없다. 성숙과 완성이란 가치는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고, 나 혼자서는 사랑도 나눔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약돌은 돌사이에서 연마되지만, 사람은 사람사이에서 연마된다. 공동체 안에서 성숙되고 완성 돼야 한다. 때론 내 가치 기준 안에서 또는 이기적 기준 안에서 공동체를 평가하고 일치하지 못함에서 갈등할 때가 있다.그러나 나만의 목표는 이기적인 목표가 될수 있고 보편적 목표가 될 수 없다. 공동체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물론 여기서의 공동체는 이데올로기적 배분을 위한 통제적 공동체를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자유와 가치를 존중하고 개개인의 목표를 존중하는 공동체를말한다. 우리의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이루고 있다. 그렇듯이 우리 각자의 개체 또한 공동체의 한 지체가 된다.손과 발이 지향하는 가치가 다를 수 없고, 왼손이 오른손의 가치를 평가할 수 없으며, 또한 눈이 내게는 손이 필요 없다 말할 수 없고, 머리가 내게는 발이 필요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오직 몸이 지향하는 공통된 가치를 찾아야 할 뿐이다.나 혼자만의 이기적 가치 때문에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갈등하고 힘들어해서는 안 된다. 부부공동체의 가치를 찾아야 하고, 가정공동체의 가치를, 직장공동체의 가치를 찾아야하며, 그리고 사회공동체의 가치와 국가공동체의 가치를 찾아야 한다. 손과 발이 나는 몸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몸은 이루질 수 없고, 아내와 남편이 나는 부부와는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부부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가족 구성원이 나는 가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한다면 가정은 이루어질 수 없다.직장도 사회도 국가도 마찬가지다.그렇다고 해서 개개인의 정체성이나 독립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개개인의 정체성과 가치는 공동체의 정체성과 가치를 위해 존재할 때에 그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하나의 벽돌은 벽돌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벽돌로서의 정체성의 가치는, 그것보다 더 크고 높은 완성된 하나의 건물로서의 정체성과 가치를 위해 존재할 때에 그 가치가 있는 것과 같다. 신(神)은 공동체 안에서의 관계를 기준으로 인간들을 평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과 성숙과 완성이란 가치는 공동체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고, 공동체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으며 나 혼자서는 사랑도, 용서도, 성숙도, 완성도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공동체 안에서 하나 되고 일치돼야 한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평화와 평안을 찾아야 한다. 갈등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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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말과 글은 자신의 생각이고 표현이다!>옛말에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고, 밤말은 쥐가 듣고 낮말은 새가 들으며, 발 없는 말이 천리 길을 가고, 한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 는 속담이 있다. 그만큼 말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나타낸 것이라 사료된다. 말과 글은 자신의 생각이고 표현이다. 말은 머리와 입, 눈과 가슴에서 나오고, 심지어는 몸에서도 나온다. 머리에서 나오는 말은 생각을 이끌어 내고,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이 묻어나며, 눈으로 하는 말은 눈치를 살피게 되고,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말은 진심을 알 수 있다. 오죽하면, 러시아 작가 막심 고리키라는 사람은 남을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者들을 향해 이렇게 말을 하였겠는가. “욕설은 한꺼번에 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욕을 먹는 사람, 욕을 전하는 사람, 그러나 가장 심하게 상처를 입는 사람은 욕설을 한 그 사람 자신이다.”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우는 한 번 한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남아일언중천금.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곰은 쓸개 때문에,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말이 씨가 된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이 곱다. 부주의한 말 한마디가 싸움의 불씨가 되고, 잔인한 말 한마디가 삶을 파괴한다. 쓰디쓴 말 한마디가 증오의 씨를 뿌리고, 무례한 말 한마디가 사랑의 불을 끈다. 은혜로운 말 한마디가 길을 평안케하고, 즐거운 말 한마디가 하루를 빛나게 한다. 때에 맞는 말 한마디가 긴장을 풀어주고, 사랑의 말 한마디가 축복을 준다. 이러듯, 일상 생활에 있어서 말이 매우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으며, 말 한마디가 삶의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글의 중요성을 강조한 경우는 부득이하여 아첨하고자 하는 자는 차라리 입으로 하고 붓으로 하지 말 것이다. 가히 참지 못하여 꾸짖을 자가 있더라도 또한 차라리 입으로 하고 붓으로는 하지 말라. - 유몽영 / 박양숙 - 말은 순간으로 남지만 글은 기록으로 영원히 남기 때문에, 말보다는 글을 조심해서 써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말과 글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하다고 비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말은 글보다 의미 전달에 있어서 탁월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므로 정확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가 어렵고, 반면에 글은 말보다 논리적이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는 있지만, 글쓴이의 숨은 뜻을 파악하기 위해 감각기관과 자신의 모든 경험을 동원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화를 잘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분위기를 조성하고, 상대를 안정감으로 유도하여, 자신의 주장과 의사를 관철시켜 나간다. 그리고 일을 잘하는 사람은 역지사지로 상대가 듣고 싶은 말은 먼저 말하고, 상대의 오감을 자극하여 감성에 호소하는 대화를 한다. 따라서 상대를 이해와 설득을 시키려면, 자신의 어휘력이 풍부하여 적재적소에 필요하고도 알맞은 말을, 상대의 수준에 맞게 콕콕 집어넣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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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가끔은 하늘을 보자><가끔은 하늘을 보자>삶이란 멀고 먼 목적지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나는 것과도 같다. 여행길을 오를 때에는 희망과 꿈에 부푼 마음으로 즐겁게 출발도 하지만, 여정 중에는 즐거울 때도 있고 기쁠 때도 있으며, 슬플 때도 있고 괴롭고 힘들고 또 때로는 지쳐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면서 시간은 흐르고 아직도 갈 길은 먼데 끝은 보이지 않고 몸은 피로에 지쳐 너무 힘들고 그렇다고 그대로 주저앉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런데 갈 길이 보이지않아 더욱 힘들고 답답함에 지쳐 있던 지금 그 목적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끔은 하늘을 보자. 달려만 가지 말고 하늘도 보고 뒤도 돌아 보자. 그리고 생각을 하자.여정 중에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생각하듯이, 삶의 목적지를 생각해 본다. 목적지를 막연히 미래의 시간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시간들이 지나갔듯이 앞으로의 시간들도 어느 순간에는 확실하게 닥쳐 올 것을 생각하게되면 삶의 끝은 현실의 시간으로 절실하게 느껴온다. 푸른 들판을 지나 멀리 보이는 산 밑 자락에 가고자 하는 여정의 목적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정신이 새로워지고 지쳐있던 몸에 힘이 다시 붙기 시작하며, 여정 속에서 힘들어하고 갈등해왔던 근심 걱정들도 사라지게 된다.목적지가 보이는 여정과 보이지 않는 여정이 다르듯이, 목적지가 보이는 삶과 보이지 않는 삶은 삶에 대한 생각이나 의미가 다르고, 삶에 대한 가치와 살아가는 방법 또한 다르며, 어려움과 문제점들에 대한 느낌들도 달라지게 된다.목적지가 보이지 않던 삶은 힘들고 지치고 막막하기만 했는데, 이제 지쳐 있던 몸과 마음에 다시 새롭게 힘을 얻게 됐다. 두 손을 쳐들고 소리 질러 본다. 야 ~ 호! 걱정이 없다. 보이는 그곳까지 갈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삶의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는 길이 어디쯤인지, 목적지가 어디쯤인지 모르기에 세상적인 것들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애쓰며, 놓치면 세상을 잃을 듯 살아왔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됐다. 목적지를 발견했고 그곳이 그리 멀지 않은 저 멀리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은 힘이 그곳까지만 갈 수 있으면 된다. 그러기에 더 이상의 세상적인 것들이 필요 없게 됐고, 더 이상의 욕심을 가질 이유도 없게 됐으며, 가진 것들이 무겁고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홀가분하게 남은 것들을 던져버려야 할 처지고, 누가 아직도 불필요한 무거운 짐들을 지고 힘들게 가고 있다면 얘기해 주고 싶다. ‘그렇게 힘들게 지고 갈 필요 없다고, 갈 길이 멀지 않다고, 거의 다 왔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그리고 또 하나의 삶의 변화가 왔다. 이제는 그곳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좀 더 사랑하며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도 갖게 된다. 남은 시간만이라도 나만을 위해 움켜쥐고 살아왔던 삶에서 좀 더 남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 때문에 그것을 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기 때문이다.소외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했으며, 배고픈 이들을 위해서, 병든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했고, 잘못한 이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용서하며 사랑했는지를, 남은 시간만이라도 그렇게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다.멀리 보이는 그곳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목적지는 보이는 사람도 보이지 않는 사람도 하루아침에 갑자기 그곳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잊어서는 안 된다. 지평선 너머로 멀리 목적지가 보일 수 있고, 산모롱이를 돌아서 갑자기 나타날 수도 있다.보이는 그 곳을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어떠한 욕심도 근심걱정도 모두 사라지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음에 미소 지으며 일용할 양식으로 감사할 수 있고, 마음에 고요와 평안을 느끼게 된다.가끔은 하늘을 보자. 그리고 여유를 갖자. 여정의 목적지가 보인다. 목적지가 보이는 삶은 살아가는 삶의 의미와 이유 또한 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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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인간과 종교><인간과 종교> 우리는 보통 종교를 자유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필요에 따라 선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것처럼 생각도 한다. 그래서 많은 종교 중 그리스도교를, 불교를, 이슬람교를 선택하거나 또는 종교는 필요하지 않은 것쯤으로, 또는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도 생각 한다. 마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고르듯이, 때에 따라서는 물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구매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도 하고, 또 때로는 액세서리처럼 사회적 품위에 맞게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하나쯤 가지고 있는 것도 품격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또, 그렇게 선택한 종교의 믿음의 대상도 내가 선택한 내 소유처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를 잘 되게 해주는 샤머니즘적 종교처럼 생각하고, 그래서 내가 바라는 대로,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쉽게 실망도 하고 또는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그런데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그러나 종교는 그렇지가 않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관계가 아닌가 생각 된다. 내가 필요에 의해 선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 속에 존재해 있을 수밖에 없는 관계가 아닌가 생각 된다. 그것은 나의 생명을 내 생각대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고, 또 죽음의 세계 역시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과도 같다. 만약 나의 생명과 나의 죽음을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종교는 필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내 자신도 모른다. 어떻게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모른다는 것은 결론 지을 수 없고 확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종교와 관계없다고 결론지을 수 없고,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확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안에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생각된다.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또한 종교는 교회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믿을 수 있게 되는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훌륭한 신부나 또는 설교를 잘하는 목사가 있음으로 해서 믿을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종교는 바로 내가 존재함으로 인해서 믿을 수밖에 없는 대상이 된다.다른 이유가 아닌, 내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종교를 찾을 수밖에 없고, 믿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인간은 종교적일 수밖에 없다.이와 같이 종교는 관계인 것이지, 필요에 따라 내 마음대로 내 의지대로 선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마치 육신의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와 같이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종교가 필요하지 않다고,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결론 지을 일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와 삶과 죽음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지혜의 삶이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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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삶은 성숙의 과정이다><삶은 성숙의 과정이다> 우리의 삶 속에는 시련과 고통이 있고, 그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성숙되고 완성되어 간다. 삶은 완성되어가는 성숙의 과정이고, 그 성숙의 과정에 시련과 고통이 있다.운동선수가 시련과 고통의 과정 없이 값진 금메달을 얻어낼 수 없듯이, 또한 단단한 쇠가 불 속에서 더욱 연단되듯이, 또는 조개가 아픔을 안고 진주를 만들어내듯이 시련과 고통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가치를 만들어낼 수 없고 성숙되고 완성될 수 없다.평안과 안일 속에서는 성숙될 수 없고 지혜를 찾을 수 없으며, 세상적인 것과 육적인 것밖에 보고 느낄 수 없고 유혹과 죄와 교만에 빠질 수 있지만, 시련과 고통 속에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많은 것을 느끼게 하며, 지혜를 깨닫게 하고 성숙되며 완성되어가게 한다. 시련과 고통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성숙이란 어린아이가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도 같다. 자전거를 배우며 넘어질 수도 있고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아이는 아파하지만, 아파하는 그때 아픔 속에서 지혜를 배우고 삶을 깨달아 간다.필자의 아내가 갑자기 눈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당뇨수치 530으로 인한 합병증) 나의 손을 붙잡고 다녀야만 했고 식탁에서는 반찬을 놓아 주어야만 했다. 양쪽 눈이 다 시력을 잃은 것이다. 양쪽 눈을 다 수술 해야만 했다. 너무 힘들다. 자전거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진다.왼쪽 무릎이 벗겨진다. 다시 자전거를 탄다. 이번에는 오른쪽 무릎이 벗겨진다. 그래도 자전거를 탄다. 이번에는 왼쪽 팔꿈치를 다친다. 그리고 오른쪽 팔꿈치를 다친다. 그래도 아버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어린아이에게 너무 가혹한 것일까. 그러나 지금 어린 아이는 지혜를 깨닫고 성숙되어간다. 나도 지금 성숙되어가고 있고, 나의 아내도, 나의 자식들도 성숙되어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만약, 그때에 힘든 나에게 하늘에서 갑자기 돈 보따리라도 하나 뚝 떨어뜨려 준다든가, 놀라운 기적이라도 내려준다면, 그렇다면 그것이 행복이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그 순간부터 또다시 교만에 빠지게 되고 지혜를 잃게 된다. 성숙되어 간다는 얘기는 키가 커져간다는 얘기도 아니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얘기도 아니다. 성숙되어간다는 얘기는 ‘사랑할 수 있는 마음’으로 변화되어간다는 얘기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깨달아간다는 얘기다. 즉 ‘나를 위한 삶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고 완성되어 가야 함을 깨달아간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것이 가치의 삶임을 깨달아 간다는 얘기다.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고통이 오더라도, 완성된 삶을 위하여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지혜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대학교를 가기 위해 과정을 거쳐야만 하듯이, 또한 한 마리의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하여 어렵고 힘든 변화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듯이 말이다.왜 착한 사람들에게 고통이 있어야만 하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고, 따질 이유도 없다. 오직 감사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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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혼자 사는 65세 이상 고령자가 630만 명이 넘는 일본에는 고독사를 주제로한 책들이 쏟아지고 있다고 한다. 사회에서 단절된 노인이 자택에서 나 홀로 임종을 맞이하는 고독사는 노인대국 일본에선 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일본에서 사망 이후 이틀이 지나도 발견되지 않은 사망자는 연간 3만 명.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고독사 원인의 65%는 질병 때문이라고 한다.혼자 살면서 가사에 익숙하지 않은 60대 남성은 전체 고독사 사건의 70%를 차지해 ‘고독사 고위험군’으로 통한다. 고독사하는 여성 비중은 낮은데, 남성보다 친분 관계가 활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고독사를 두려워하기보다 살아있을 때 고립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고독사가 사회문제로 대두 되고 있다. 비단 일본사회뿐만 아니라 우리사회도 마찬가지다. 통계에 의하면 급속고령화와 가족구조 붕괴로 최근 5년간 9,734명의 고독사가 발생 했고, 그중 노인의 고독사는 4,170명으로 전체의 42.8%를차지한다고 한다. 생각지 못했던 청년 고독사도 상상외로 많다. 고독사를 고립사(孤立死)라고도 한다. 주변의 가족이나 또는 사회가 무관심으로 고립시켰기 때문이라는 것이다.필자는 기사를 접하면서 생각나는 또 하나의 고독사가 있어 잠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마 전 필자의 절친 한 분이 고독사 했다. 명문대를 나왔고 사회적 지위에 있던 사람이다. 사후 1주정도 지나서야 주민센터로 부터 연락을 받고 알았다고 한다. 불가항력적일 수도 있지만, 선택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팠다.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생활해 왔다.나는 얘기를 듣고 많은 생각을 했다. 물론 놀랬고 허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외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을까.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데. 가 본 적도 없는 그 길을 혼자서 얼마나 두려웠을까. 얼마나 힘들었기에 두려운 그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하고 생각을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고독사에 대한 사회적 대책은 차치하고라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보통은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 한다. 한 줌의 흙으로 사라져 가는 것이라고 생각도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 것인가? 죽은 다음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일까. 죽음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천국이 있는지, 지옥이 있는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흙에 묻혀 사라져버리고마는 그런 삶이 아닐 것 이라는 얘기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삶을 우리 마음대로 흙에 묻혀 끝낼 수 있는가. 그럴 수가 없다.죽음을 단순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우리는 답을 모른다. 모르기에 두려운 것이고 그래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한 죽음이 아니라 준비하는 죽음이 돼야 한다. 종교를 얘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현실을 얘기하자는 것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뭘 죽음까지 생각할 수 있느냐 얘기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죽음을 남의 일로만 생각할 수만은 없지 않는가. 준비를 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닌 죽음이 찾아 왔을 때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맞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분명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삶이 아니다. 바쁜 일상이지만 한 번쯤 잠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지혜의 삶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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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 아픔을 모르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삶속에는 많은 시련과 고통들이 있다. 그래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따라서는 삶을 포기하기까지도 한다. 그러나 아픔을 아픔으로만 느껴서는 안 된다. 아픔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픔의 가치가 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들이다. 그런데 아픔을 모르고는 사랑할 수 없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대상과 하나 되고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 아픈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픈 사람과 일치돼야 하고, 고통 받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고통 받는 사람과 일치될 수 있어야 한다. 대상과 일치될 수 없다면 대상이 바라고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없다.그러면 일치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일치되기 위해서는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픈 사람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도 아파 봐야 하고 고통도 받아 봐야 하며, 그래서 그 고통과 아픔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없다.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나만의 사랑은 자칫 교만이 될 수 있고, 상대에게는 다른 아픔이 될 수 있다.아파 본 것만큼, 고통 받아 본 것만큼 하나 되고 일치될 수 있으며 그때에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고, 또 실패해 본 것만큼 좌절해 본 것만큼 하나 되고 일치될 수 있으며 그때에 바라고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 체험하지 않은 것만큼, 아픔을 모르는 것만큼 그 이상은 사랑할 수 없다. 아픔의가치가 거기에 있고 고통과 실패와 좌절의 가치가 거기에 있다.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아파야 하고 실패해야 하며 잃어버려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또한 체험이 없는 사랑, 아픔을 모르는 사랑, 그래서 완전하지 못한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그러지 않고는 상대와 일치될 수 없고 그래서 완전한 사랑을, 상대가 바라고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없다는 애기다. 배가 고파 본 사람만이 배고픔의 아픔을 알 수 있고 배고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며 배고픈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실패해 본 사람만이 실패의 아픔을 알고 실패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실패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 아파 보지 않은 사람이 아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배가 고파보지 않은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이해할 수 있어서 바라고 원하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잘 못 판단일지 모른다.아픔을 모르고 고통을 모르는 것은 아직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아픔과 고통의 가치다. 그러므로 모든 시련과, 고통과, 실패와, 좌절의 아픔을 아픔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고, 그것들이 주는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아픔은 삶을 성숙시키는 발판이 된다.우리에게 닥쳐오는 어떠한 시련과 고통도 다 참고 받아들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