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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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택 칼럼 - < 부끄러운 일이다 >신(神)은 인간들을 공동체로 만들었다. 이유는 혼자서는 나눌 수도, 베풀 수도, 사랑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공동체라는 건물의 완성을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번뇌와 갈등은 내 중심적 생각에서 온다. 그래서 괴로워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스러워한다. 그렇지 않다면 힘들어할 이유가 없고, 내 중심적 생각이 아니라면 갈등하고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존재한다. 아직도 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부끄러운 일인지 모르고 있다면 또한 부끄러운 일이다. 아직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다고 한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부끄러움은 잘 못하거나 양심에 거리끼어 볼 낯이 없거나 떳떳하지 못함이다.때로는 세상적인 것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갈등하며 살아 간다.그런데 걸을 수만 있어도 행복인 것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볼 수 있고 말 할 수만 있어도 행복인 것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함께 할 수만 있어도 행복인 것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또한 물질을 가지고 자랑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권력과 명예을 가지고 자랑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아직도 자랑할 것이 남아 있다고 자랑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사랑은 하나 되고 일치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대를 알지 못하고, 또 이해하지 못하고는 하나 되고 일치될 수 없고 사랑을 할 수 없다. 아픈 사람의 아픔을 모르고, 고통 받는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하나 되고 일치될 수 없고, 그래서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다.그런데 아직도 아픔과 고통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아직도 배고픈 사람의 배고픔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소외되고 헐벗고 버림받은 이들의 아픔을 모르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다.우리 모두는 잠시 후면 떠나간다. 세상적 가치도 떠나가고 미움도 아픔도 다 떠나간다. 자랑할 것도 아쉬워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아직도 자신의 존재를 볼 수 없고 떠남을 생각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고, 모든이들이 아끼고 사랑해야만 할 대상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부끄러운 일이며, 모든이들이 아쉬워해야만 할 대상들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역시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아끼고 사랑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게 될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다.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서로를 위해 산다. 나만을 생각하고 나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면 부끄럽고 후회스런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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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택 칼럼 - < 위로받을 수 있는 이유 >때로는 세상을 원망하고 절망하며 살아 간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생각이다. 감사해야 한다.우리는 내가 내 자신의 것인 줄 착각하며 살아 간다. 그래서 아쉬워하고 미워하고 아파한다. 그리고 고민하고 힘들어하고 갈등한다. 우리는 원래 없었다. 그리고 원래대로 없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것들이 내 것이 되고, 욕심내고 힘들어 하고 아파하고 갈등할 수 있는 건지. 그리고 나만을 주장하며 살아갈 수 있는건지.감사해야 한다.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영원으로부터 선택되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생명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 건강한 것만으로도 그것은 감동이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행복인 것을 몰랐다. 아파할 수 있고 고통할 수 있으며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 있는 것이행복인 것을 몰랐다. 살아 있음이, 존재할 수 있음이 행복인 것을 몰랐다. 반면 불행인 것을 몰랐다. 아파할 수 없고 고통할 수 없으며 실패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 없는 것이 불행인 것을 몰랐다. 우리는 없었다. 그래서 아파할 수 없었고 고통할 수 없었으며 좌절하고 절망할 수 없었다. 그런데 고민하고 아파하고 좌절하고 절망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눈을 만들지 않았고 귀를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길가에 핀 예쁜 꽃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늘의 맑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 감사한 일이 아닌가. 우리는 코를 만들지 않았고 입을 만들지 않았다. 그런데 라일락꽃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누군가를 위해 복을 빌어줄 수 있다. 감사한 일이 아닌가.이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우리는 욕심내며 살아 간다. 그래서 갈등하고 번뇌한다. 번뇌는 소유에서 생기고 평화는 비움에서 생기며, 번뇌는 내 것이 아닌 내 것에 갇혀있을 때 생기고 평화는 그것으로부터 해방됐을 때 생긴다.내가 내 것으로 착각할 때 교만하게 되고 번뇌하고 힘들어하고 갈등하지만,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때 겸허할 수 있고 내어놓을 수 있으며 평화를 얻을 수 있고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며 감사할 수 있다.욕심낼 이유가 없고 교만할 이유가 없으며 좌절하고 절망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없었고 또한 원래대로 없어진다. 주변만을 보지말고 높은 하늘을 보자. 현실만을 보지말고 먼 시간을 보자.내가 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고 여유로움을 찾으며 감사함을 깨닫게 된다.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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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택 칼럼 - < 선행이 잘 안 되는 이유 >나만을 위한 이기적 삶에서 남을 위한 삶으로 옮겨가야 한다. 그것이 잘 사는 삶이고 가치 있는 삶이며 완성된 삶이고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의 삶이다. 그런데 남을 위한 삶이란 처음부터 거창하거나 대단한 일로서 어렵고 힘든 일만은 아니다. 작은 일 하나에서부터 즉, 떨어진 휴지 하나를 줍는다든지 또는 작은 미소 하나를 건넨다든지 하는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그러나 실제로는 '그렇게 해야겠다'하고 생각도 하고 또 그렇게 행동도 해 보지만 망설여지고 주저하게 되며 생각만큼 쉽게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선행의 실천이다. 마음은 ‘그렇게 해야겠다’고 생각도 하고 원하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행동으로는 선뜻 용기가 나지 않는다.그 이유가 무엇일까. 무엇 때문에 마음에서 하고자 하는 선행을 잘 할 수 없는 것일까. 그 이유를 보통 체면이나 품위 또는 창피하고 쑥스러워 망설여지고 용기를 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정말 그런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본다.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품위나 체면이나 쑥스럽고 창피함 등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왜냐하면 품위란 ‘인간이 갖추어야 할 위엄이나 기품’인데, 그렇다면 남을 돕고 위하는 일이 위엄이나 기품에 어긋나는 일이 되는가. 지체장애인이 건널목을 힘들게 건너가고 있을 때, 얼른 손이라도 잡아 도와주는 일이 품위에 어긋나는 일인가. 깨끗한 도로 위에 떨어진 오물 하나를 줍는 일이 품위에 어긋나는 일인가. 전철이나 지하도에서 구걸하는 사람에게 남의 눈치 봄 없이 얼른 천 원 한 장 이라도 건네주는 일이 품위에 어긋나는 일인가. 아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하지 못하는 그것이 오히려 품위에 어긋나는 일이 될 것이다.그렇다면 체면 때문일까. 체면이란 ‘남을 대하는 됨됨이와 도리’인데 그렇다면 그것 또한 아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할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그것이 오히려 체면에 어긋나는 일이 된다.그러면 창피함 때문인가. 창피함이란 ‘떳떳하지 못하거나 체면이 사나워 부끄러운 상태’로, 이것 역시 오히려 남을 돕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그것이 떳떳하지 못한 창피한 일이다. 물론 용기도 아니다. 용기만 가지고는 선행을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마음에서 원하는 일을 선뜻 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교만의 마음 때문이다. 용기가 나지 않고 쑥스러워지고 눈치가 보이는 것은 겸손이 아닌 우리가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체질화 되고 자기화된 교만의 마음이 우리를 통제하고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다.교만이란 ‘잘난체하는 태도로 겸손함이 없이 방자한 것’으로 자신만을 내세우고 나타내려 하는 이기적 행위가 바로 교만의 행위가 된다.교만의 모습은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게 교만의 생각과 행동들이 본래의 모습에 덧입혀지게 되고, 그래서 자기화 되고 체질화된 그것들을 우리는 품격이나 인격 등의 모습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신의 모습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를 망설이게 하고 주저하게 만드는 것은 체면이나 품위나 용기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떻게 해. 쑥스럽고 창피하게, 남이 보면 어떻게 생각하지’ 하는 교만의 마음 때문에 하고자 하는 선행을 할 수 없게 된다.자신의 교만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을 버리지 않고는 자유롭게 선행을 할 수 없고 사랑을 완성시킬 수 없다. 사랑은 완성해 가야 한다. 그것이 삶의 이유고 존재의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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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인택 칼럼 - 경쟁(競爭)우리는 TV 화면을 통해 동물들의 세계를 보면서 의문시되는 것이 있다. 다른 동물들에게 피해도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아가는 초식동물들이 왜 포식동물들에 의해 잡혀 먹혀야 되는지, 죄 없는(?)초식동물들의 어린새끼들이 몸부림치며 잡혀 먹힐 때에는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를 일이다. 사랑의 신(神)이라면 말이다.모든 생명체가 풀이나 열매들을 먹고 생존할 수 있도록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먹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다.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힘 있는 나라가 힘없는 나라를 지배하고 강자가 약자를 약탈한다. 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했는지, 왜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지배하게 했는지, 힘 있는자가 힘 없는 자를 지배하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들이 서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도록 하지 않고, 지배를 하고 지배를 받게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그런데 이러한 생각이 든다.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번성하고 발전해야 한다.그런데 만약, 모든 생명체들이 생명의 위협에서 오는 생존경쟁 없이 또는 투쟁 없이 평화롭게만 살아가게 했다면 과연 번성하고 발전할 수 있을까. 종족번식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을까. 나라와 나라가 또는 사람과 사람들이 생존의 위협이나 경쟁 없이 살아가게 했다면 과연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그런데 그렇지 않다. 종족번식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발전하지 않을 것이다. 종족번식과 발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번성과 발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초식동물들이 포식동물들 앞에서, 또는 약자가 강자 앞에서 생존을 위해 또는 번식과 발전을 위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경쟁하고 투쟁할 이유가 없고 경쟁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결코 번성하고 발전할 일은 없을 것이다. 또한 모든 생명체들이 먹지 않고도 생존할 수 있다면, 식물도 동물도 인간들도 노력하고 경쟁할 일이 없고 그래서 또한 번성하고 발전하는 일은 없다. 모든 생명체들이 먹기 위해, 또는 종족 번식을 위해 경쟁하며 생존하도록 한 것은 신(神)의 섭리다. 우리가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도 번성하고 발전하기 위한 경쟁 때문이다. 경쟁이 아니라면 바쁘게 살아갈 이유가 없다.배부르고 평화롭다면 경쟁할 일이 없고, 경쟁할 일이 없으니 노력할 일이 없으며, 노력할 일이 없으니 발전 또한 없다.평화만 있는 게 평화가 아니고, 행복만 있는 게 행복이 아니다. 놀고먹기만 한다면 비만에 걸리고, 평화만 있다면 나태되며, 정체돼 있다면 부패되고 퇴보될 것이다. 경쟁 없이 정체돼 있는 것은 잘못이다.번성하고 발전해야 한다. 그 과정에 투쟁과 경쟁과 시련이 있다. 펩시의 회장이었던 웨인 캘로웨이는 이렇게 말 하고 있다. "나를 없애려는 경쟁자를 계속 바라보는 것만큼 내 일에 집중하게 해주는 건 없다"고. 경쟁자에게 생존의 위협을 받는 건 그 자체로 위기일 수 있지만, 그러나 경쟁은 자신을 보다 더 강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자극 받는 것만큼 동기부여가 되며, 경쟁자의 장점이 나의 한계적 생각과 능력의 변화를 가져 올 수 있다. 그래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경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선의의 투쟁과 선의의 경쟁이어야 한다. 번성과 발전을 위해 최선의 경쟁을 해야 한다. 그것이 만물을 사랑하는 신(神)의 섭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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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호국보훈의 달 6월 단상>매년 6월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하신 국가유공자분들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감사함을 잊지 않기 위해 다짐을 해 보는 ‘호국보훈의 달’이다. 6월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날은 6월 6일 현충일이 아닐까 한다. 현충일은 국가의 안위가 풍전등화 같은 처지에 있을 때에 나라의 존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장병과 애국선열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제정된 날이다. 오늘날 우리가 자유와 평화 안정,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것은 목숨 바쳐 나라를 되찾기 위해 싸운 항일독립운동가와 조국을 지킨 호국영령의 고귀한 헌신,숭고한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시간이 갈수록 현충일의 의미가 퇴색되고 잊혀지고 있어 안타깝다. 호국보훈의 달 6월 한달만이라도 애국선열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 국가유공자와 유가족에게 따뜻한 관심과 사회적 배려가 있었으면 한다. 그분들의 뜻과 정신을 기리며 그 가족을 보살피는 것은 국가 책무이자 국민의 도리다. 누구나 말로는 나라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은 나라를 되찾겠다는 희망으로,우리 삶을 온전케 하리라는 믿음으로 아낌없이 자신의 몸을 던졌다. 불과 얼마 전인 20세기 초 우리의 삶은 가시밭길로 점철된 고난의 역사였다. 100년 전 일제 강점기에는 나라를 잃었고,6·25전쟁으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됐다. 그러나 우리 호국영령들은 역사의 거친 도전에 맞섰다. 짙은 포연과 함께 조국을 가슴에 안고 스러져 간 무명의 유격대원들,낙동강 전선에서,백마고지에서 펜 대신 총을 들고 목숨이 다할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웠던 젊은 학도의용군들,그들은 조국을 위해 가장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이 나라 이 민족을 사랑했기에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던 호국영령들께 한없는 존경과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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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인기는 독이 된다>높은 산에 오르면 모진 비바람을 견뎌내고 자란 고목들을 볼 수 있다. 그런 나무들은 생명력이 강하고 단단해 쓸모있는 나무가 되지만, 그러나 온실속에서 고이자란 나무는 조그만 비바람에도 견뎌내지 못한다. 또한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심을 때가 있고 성장할 때가 있으며 거둘 때가 있다. 하나의 식물도 봄에 싹을 내고 비바람을 맞으며 성장의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는다. 중요한 것은 양분도 중요하지만 성장하는 과정 또한 중요하다. 온실속의 나무는 양분은 충분하겠지만 작은 비바람에도 견디기 어렵다. 작은 비바람을 견뎌내야 큰 비바람을 견뎌낼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성숙 된다. 환경도 여건도 중요하지만 성장의 과정 또한 중요하다. 어려움과 시련을 잘 견뎌 낼 수 있는 성장과정의 체험이 필요하다. 시련을 잘 견뎌낸 사람은 큰 고난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지만, 어려움 없이 고이 자란 사람은 조그마한 시련에도 견뎌낼 수 없다. 그리고 어려움 모르고 자란 사람은 아픔과 고통을 모르기에 남의 아픔 또한 모른다. 그것이 교만이고 불행이 된다. 인간은 아픔을 알고 시련과 고통을 겪어봐야 한다. 그런 체험을 해야만 겸허해질 수 있고 남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그리고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걱정되는 것이 있다. 요즘 TV를 보면 어린 학생들이 트로트 경연 프로에 많이 참여한다. 노래들을 참 잘한다. 천부적이다.그래서 관중들로부터 열광을 받고 인기를 얻는다. 한두 번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출연을 하기도한다. 열광과 인기는 더해 간다. 그래서 하는 얘기다.어린 나이에 관중들로부터 열광과 찬사를 받고 인기를 누리게 되는 것이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에는 양분도 중요하지만 눈비바람을 맞을 수 있는 적응의 과정이 필요하듯이, 사람 또한 찬사와 인기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픔과 시련과 고통 또한 필요하다. 그래야 겸손을 배우고 이해와 양보를 배우며 사랑을 배운다. 타고난 재능을 소개하는것은 좋다. 사람들로부터 재능을 인정 받고 칭찬받는 것은 좋다. 자신감을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다. 그런데 어린 나이에 성인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인기를 누리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 아닌가 한다. 판단력이 부족한 어린나이에 칭찬과 인기를 누리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닐 것 같다. 인기는 눈을 멀게하고 귀를 듣지 못하게하며 자칫 교만에 빠질 수 있게 한다.어린아이들은 스펀지의 물 흡수하듯이 그대로 흡수된다. 그래서 제작진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어린 아이들의 성장과정은 생각하지 않고 시청율만을 지향한 방송은 아닌지. 칭찬과 인기만 먹고자란 아이들의 장래가 어떨 것인지를 생각해 봤는지. 삶은 성숙을 위해 단련해가는 과정이다. 눈비도 맞아봐야하고 비바람도 맞아 봐야 하며 태풍 또한 맞아 봐야 한다. 비바람을 맞아봐야 비바람을 맞는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며 더 큰 비바람을 맞을 수 있다.칭찬과 인기는 독이 된다. 천부적 재능을 좋은 그릇에 담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않은가 생각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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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 나는 무엇에 감동하며 살고 있는가? >산을 오르다 보면 계곡에는 맑은 물이 바윗돌 사이를 지나며 노래를 부른다. 그런데 어떤 계곡에는 비가 내리거나 비 온 뒤에만 물이 흐르고, 어떤 계곡에는 항상 물이 흐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계곡에 물이 항상 흐르려면 어디선가 땅속으로부터 샘물이 솟아 나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상처와 갈급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래서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한다. 어떤 사람은 많은 돈을 벌어서 갈급함을 채우려 하고, 어떤 사람들은 관중의 환호를 받기 위해 연예인이나 운동선수가 된다. 혹자는 유권자의 갈채를 받으려고 정치에 중독돼기도한다. 어떤 부모들은 자녀들이 잘 되는 모습을 보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올인하기도 한다. 그러나 한때 잘나가던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환호하던 유권자들이나 관중이 떠나간 뒤에 좌절하고 초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주변에서 흔히 보게 된다. 봄이 오면 어린 욕망의 싹을 내고 신록이 우거진 한 여름에는 무성한 이파리 때문에 보이지 않던 나무들도 서쪽에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잎을 떨구고 겨울이 오면 본체를 들어내고 나목으로 한 겨울을 견디며 다음 봄을 기다리며 또 하나의 나이테를 만들어 가듯, 우리도 언젠가는 세상의 물질과 권력과 명예의 잎사귀가 떨어져 나가고 몸통이 드러나게 된다. 그때의 모습이 진정한 내 모습이다. 계곡에 물이 항상 흐르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흘러 들어오는 물 외에도 땅속으로부터 샘물이 솟아나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만족도 외부에서 찾는 것은 언젠가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행복한 사람은 외부로부터 찾는 만족감 외에 내부로부터 감사와 기쁨의 샘물이 항상 솟아나는 자아를 가지고 있다. 내면에 여유가 있는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기 속에 감사와 경탄의 공감능력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면의 여유가 있는 사람은 세상의 모진 바람을 피하거나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바람을 헤쳐 나가며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불만의 대상이 아니라 감사와 경탄의 대상이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사와 경탄의 샘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나는 지금 돈, 명예, 권력, 친구가 떠나가도 항상 내면의 여유를 가지고 감사와 경탄의 샘물이 솟아나는 자아가 준비되어 있는지 점검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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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 지혜의 삶 >TV 화면을 통해 가끔 아프리카 야생동물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동물들의 살아남기 위한 생존경쟁을 보고 있노라면 흥미롭다기보다는 때로는 처절하다는 생각까지 든다.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은 그렇지 않은가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나 인간들의 삶도 동물들의 삶과 다를 것이 없다.열차를 타고 넓은 평원을 달려 본다. 이때 논밭 저 멀리의 나무나 전주들이 하나 둘씩 달리는 열차를 스치며 사라져 가는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첫 번째 전주가 스쳐 사라져가고, 두 번째 전주가 사라져 가며,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전주가 스치며 사라져 가고 있다. 이제 첫 번째 두 번째의 전주는 이미 저 멀리에 가물거리며 보이지 않게 사라져 가고 있고 그럼에도 열차는 쉴 줄 모르고 달려가고 있다.우리의 삶의 시간과 비교해 본다. 5개월 전의 어느 날도 벌써 지나간 지 오래됐고, 4개월 전의 어느 날도 지나간 지 오래 됐으며, 3개월 전, 2개월 전, 1개월 전의 날들도 모두 사라져 지나갔고, 어제의 시간도, 조금 전의 시간도 쉴 사이 없이 우리를 스치며 사라져 간다.5개월 전, 4개월 전의 날들은 이미 아득히 기억에서도 멀어져 가고 있고, 이제 눈앞에 보이는 내일도 오늘처럼 그리고 모레도 몇 개월 후의 날들도, 1년 후의 날들도, 우리를 스치며 뒤로 사라져 갈 것이다. 삶의 시간은 무서운 속도로 쉴 줄 모르고 달려오고 있고 그러므로 결국 삶의 마지막 시간마저도 분명 우리 앞에 닥쳐올 것이며 그리고는 곧바로 영원의 시간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생각해 본다. 삶의 마지막 시간이 우리를 스쳐 지나갈 때에 지나치는 그 순간부터 현재의 존재하는 모든 것들, 부귀도 명예도 권세도 고통도 미움도 갈등도 그 어느 것들도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다는 것을....그렇다면 그것을 진정으로 깨닫고 느낄 수 있다면 세상 것 무엇 하나에 목숨 걸고 싸울 만한 의미가 있는지, 증오하며 다툴 만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의미가 없다. 아무 의미가 없다. 적을 만들고 투쟁하며 원수를 만들 아무런 이유가 없다.인간관계에서의 모든 갈등과 미움과 적을 만들고 원수를 만드는 일들이 한낱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일이며, 스쳐 지나치는 순간부터 다시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는 것들이기에(또는 사람들이기에) 참을 수 있고,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으며 아쉬워하고 아끼고 사랑하고 그리워해야만 할 대상들인데 그런데 그러지를 못한다.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깨달아야 한다. 투쟁을 위한 적을 만들고 원수를 만드는 일들이 아닌,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우리는 나만을 위한 이기적 삶을 살 수 없고 적을 만들고 원수를 만드는 일을 할 수 없으며, 아쉬워하고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현실에서 겪는 어떠한 갈등도 미움도 고통도 시련도 그 무엇들도다 참고 견뎌낼 수 있다.그것이 지혜의 삶이고 가치의 삶이다. 동물들과 같이 어리석고 바보스러운 이기적 삶을 살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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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 갈등(葛藤)과 이해(理解) >우리는 '이해'라는 말을 한다. 예를 든다면 사람들사이에 어떠한 갈등(葛藤)이나 다툼이 있을 때 "네가 이해하라"는 말을 한다. 네가 나이도 많고 또 배운것도 많고 또는 네가 남자니까 이해하라는 말이다. 이때에, 물론 다는 아니지만 사람들 중에는 이해라는 말의 뜻을 "네가 양보해라" "좀 희생하라"는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네가 나이가 많으니까, 네가 남자니까 양보하고 수용하라는 얘기다.이와같이 이해라는 말이 양보, 수용, 희생, 용서, 등의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나 그러나 사전적 의미는 그렇지가 않다. 양보나 희생이 아니라 '깨달아 앎' 이다. 사실 그대로 팩트(fact)를 아는 것이 이해다. 양보하거나 희생할 필요 없이 사실 그대로를 알면 된다는 얘기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나에 대하여 험담을 했을 때 그래 "내가 이해할께" 한다면 그 때의 이해는 내가 수용할께, 못 들은척 할께, 용서 또는 희생할께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나 이해란,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나에게 욕을 했는지, 내가 험담을 들을만한 이유가 무엇인지 그 것을 '깨달아 아는것'이다. 그래서 아, 내가 그 사람 입장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그사람 생각에대해 깨닫는 것이 이해의 의미다. 다시말하면 그 사람의 입장이 될 수 있는 것이 이해의 뜻이라는 얘기다.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갈등속에 살아간다. 그러면서 그 갈등을 참고 인내하기 위하여 힘들어 한다. 갈등이란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 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상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또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갈등하고 그것을 참고 인내하기 위하여 힘들어 하는 것이다. 그런데 참고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 상대의 생각이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또는 목표가 다르다고 해서 충돌하며 힘들어 할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갈등 때문에 힘들어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생각과 뜻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왜 나에 대해 험담을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 선심 쓰듯 참고 인내하며 애쓸 필요가 없다. 상대가 그런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생각을 깨닫고, 나를 험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다면 그렇다면 충돌하고 힘들어하는 갈등은 없어지게 된다. 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내 자신도 그런경우가 된다면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해다. 양보나 희생의 이해가 아닌 깨달아 아는 이해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목표나 생각이 같아질 수는 없지만 힘들어할 필요가 없고 충돌과 다툴 이유가 없게 된다. 갈등은 양보하는 이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을 깨닫는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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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칼럼 - < 맑은 물엔 고기가 없다 >맑은 물엔 고기가 없다.우리는 흠결이 있는 것보다는 완벽한 것을 좋아한다. 완벽한 제품, 완벽한 기술, 완벽한 사람등 완벽한 것을 좋아 한다.완벽하다는 것과 철저하다는 것 자체는 결코 부정적 의미는 아닐 것이다. 완벽하다는 것은 흠결이 있고 실수가 있는 것보다는 그래도 좋은 뜻의 의미일 수 있다.그리고 완벽한 사람은 완벽한 만큼 남에게 약점이나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다.그리고 완벽한 생활을 하는 것이 그렇지 못한 생활보다는 그래도 ‘남들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도 한다.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는 것 만큼 남을 이해하고 잘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사실이 그런가 하고 생각해 본다. 완벽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더 이해를 잘 하고 남에게 잘 해 주고 있는지.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완벽한 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흠결도 원치 않을 뿐더러, 자신의 완벽한 생활만큼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완벽을 원한다. 그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러면서 그러지 못했을 때에는 그것을 수용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로운 행동이라고 생각도 한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더 관대하지 못하고 잘못함에 대해 용서가 어렵다는 얘기다.중요한 것은 완벽한 사람들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 있다. 우선 사람들을 잃는다. 맑은 물에는 고기가 없다. 흐린물에 고기가 모이듯이 완벽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다. 어려워서 접근을 안 한다. 그러니까 사람만 잃는 것이 아니라 정보 또한 잃는다. 대화가 어렵다보니 삶의 귀중한 정보들을 얻을 수 없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다. 큰 것을 잃는다.필자도 조금은 완벽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결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인간들은 완벽에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어느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잘못함과 흠결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이해 받고,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잘못과 흠결에 대해서도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인간들은 그렇게하기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들이다.자신의 잘못과 흠결을 인정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지만, 자신의 흠결에 대해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도 용서가 어렵다. 완벽은 흠결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고 용서는 흠결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어야 한다.나의 부족함을 다른 사람들의 이해와 용서로 채울 수 있어야하고,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나의 이해와 용서로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인간들은 원래 서로 돕고 이해하고, 채움받고 채워주며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 신(神)은 완벽보다는 이해받고 이해하는 것을 원할 것이다. 완벽을 주장하는 삶은 어쩌면 완벽하지 못한 삶보다도 부족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